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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호칭 조와 종에서 엿보는 조선시대 세계관 - 왕현철 전 KBS PD/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저자
  • 기사등록 2022-09-02 17:43:42
  • 기사수정 2022-09-08 15: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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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조선의 왕 이름 순서를 외우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그 뒤에 조祖와 종宗을 붙였다.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이 된다.

 조와 종을 정하는 원칙은 조공종덕祖功宗德이다. 즉 공이 있으면 조, 덕이 있으면 종을 붙였다. 여기서 공은 나라를 세우는 것과 버금가는 것을 일컫는다.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뿐이었으나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뿐만 아니라 세조, 인조, 선조...... 등 여러명의 조가 있다. 어떤 근거에서 조와 종을 붙였나?



세계문화유산 종묘 (서울 종로구) . 왕이 승하해서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신주에 왕의 묘호를 쓴다.  사진 = 한영분 우리궁궐지킴이 



 왕이 승하하면 묘호와 시호를 올린다. 묘호는 종묘의 신주에 쓰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왕의 이름으로 부르는 태조, 세종 등을 말한다. 시호는 왕의 공덕을 압축하는 글자다. 대체적으로 8자이나 이보다 훨씬 길기도 했다. 


 태종8년 조선의 제1대 왕이 승하하자 묘호를 ‘태조’라고 짓고, 시호는 ‘지인 계운 성문 신무’ 8자를 했다. 조선을 창업한 왕의 묘호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태조가 승하한 3개월 후였다. 

 임금이 승하해도 바로 묘호를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제2대 왕은 묘호를 받지 못했다. 그는 왕위를 물려준 후 ‘공정왕’ ‘상왕’ ‘노상왕’으로 불리었다. 제2대 왕의 실록도 원래 이름은 <공정왕실록>이다. 

 

묘호를 받지 못하면 종묘에 신주를 올리지 못한다. 왕이었으나 종묘 제사를 받지 못하고 자손도 대군이나 군이 아니라 정윤이나 원윤이 된다. 공정왕의 후손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고 묘호를 추상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공정왕은 나라를 세우고 조정을 안정시킨 공덕이 없습니다.”<성종실록12년 8월 13일>

 “태종이나 세종께서도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은 것은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성종실록13년 7월 20일>

 성종은 그동안 한 번도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은 어떤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정왕의 묘호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숙종 때다. 숙종은 공정왕의 묘호가 빠져 있음을 알고 명을 내렸다.

 “유독 공정대왕만이 묘호가 빠졌다. 미안한 일이다. 논의하라.”<숙종실록7년 7월 23일>

 영의정 김수항, 영중추부사 송시열 등 대부분의 대신들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거나 양위한 덕이 있다고 하면서 ‘정종定宗’으로 묘호를 올리고 결정됐다. 조선의 제2대 왕이 ‘공정왕’에서 ‘정종’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사후 262년 만이었다. 

 

시호도 ‘의문 장무’ 네 자를 더하고, 신주를 고쳐 쓰고 종묘로 옮기는 의식을 거행해서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교서를 반포해서 널리 알렸고, 사죄이하는 사면하고, 축하하는 증광시까지 치렀다.

 묘호를 올리면서 대대적인 추가 절차를 밟은 것이다. 묘호를 올리는 것은 나라의 주요한 의례였던 것이다. 


 단종은 왕위를 물려준 후 ‘상왕’으로 불리었으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신분이 떨어졌다. 이 역시 숙종 때 단종으로 묘호를 올려주었다. 단端은 예와 의를 지켰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에 비해서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군君’에 머물렀고 묘호를 얻지 못했다. 


 

단종이 유배돼 살았던 청령포(강원도 영월군). 단종은 왕에서 물려난 후 상왕이 되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다시 단종으로 묘호를 받았다.  사진=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 




조와 종은 우열이 없다고 했으나 선왕에게 조를 붙이고자 했다. 그 첫 시작은 예종이다. 예종은 부왕이 승하하자 빨리 존호를 올리고자 신하들을 재촉했다. 이에 나라의 주요 대신들이 모여 논의를 거쳐서 신종, 예종, 성종으로 ‘종’을 후보로 올렸고 시호는 열문 영무...... 8자를 정했다. 

 예종은 우선 시호를 문제 삼았다. 시호에는 자신이 내려준 글자도 빠졌고, 글자 수도 제한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덟 자로 했다고 하면서 매우 화를 냈다. 그 이전의 왕,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시호도 모두 여덟 자이다. 

 “내가 어리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했는가?” <예종실록즉위년 9월 24일>


 예종은 오히려 자신을 나이로(18세) 무시하느냐고 신하들을 압박했다. 임금의 말씀에 냉랭한 기운이 돌고 신하들은 전전긍긍했다. 예종은 자신의 속내를 꺼냈다. 

 “(부왕은)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으니 ‘세조’라고 할 수 없는가?” <예종실록즉위년 9월 24일>

 신하들은 왕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신하들이 올린 후보 ‘종’은 제외되고 제7대 왕 ‘세조’가 탄생했다. 또한 세조의 시호는 매우 길다. ‘승천 체도 ......’로 열여덟 자다. 앞선 왕보다 열 자를 더한 것이다. 


예종은 이것도 모자라서 ‘흠숙’을 더해서 모두 스무 자로 다시 고쳤다. 시호가 너무 길어서 오히려 외우는 것이 힘들 정도다. 아무리 좋은 시호도 기억하거나 불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묘호는 왕의 사후에 신하들이 논의를 거쳐서 올리는 것이지만 예종은 자신의 묘호를 생전에 ‘예睿’로 정해두었다. 슬기롭다 총명하다의 뜻이다. 부왕의 묘호를 처음 정할 때 신하들이 자신의 뜻과 다르게 올린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뜻대로 예종이 되었다.

 

중종은 39년 간 재위했다. 인종은 부왕이 연산군을 쫒아낸 반정을 이루었고 40여 년 동안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크다고 해서 ‘조’를 붙이고자 했다.

 “부왕은 공과 덕을 갖추었고 또한 공이 현저하니 ‘조’를 간절히 원한다.”

 “아무리 나라를 중흥했다고 해서 ‘조’로 불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인종실록1년 1월 6일>

 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달랐다. 

 광해군도 부왕의 묘호를 ‘조’로 불리기를 원했다. 부왕의 재위 41년간 나라를 빛내고 난을 다스렸다는 공을 내세웠다. 부왕 때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국토 침탈로 보기 보다는 국난을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선종’으로 올렸고 결정됐다. 광해군의 즉위 초기는 신하들의 뜻대로 되었으나 광해군 8년에 기어코 ‘선조’로 변경한다. 그리고 존호도 추가로 올려서 ‘유명증시 소경......’으로 무려 48자로 했다. 다른 왕의 시호 8자보다 6배가 많은 글자 수다. 좋은 뜻을 48자로 나열했으나 이 역시 기억하고 부르기가 쉽지 않다. 

 

딴은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피난길에 따라간 신하들을 호종공신(호성공신으로 변경)으로 올려주었다. 무려 86명으로 내시도 24명 포함되었다. 내시는 공이 있으면 상을 주는 것이었으나 공신으로 올려준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의 집념으로 부왕은 ‘선종’에서 ‘선조’로 바뀐 것이다. 

 

인조는 처음에 열조烈祖로 결정했다. 그러나 열조는 남당을 세운 서지고의 묘호라고 해서 바꾸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삼국시대 유비의 묘호가 소열昭烈이기 때문에 ‘열’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결국 ‘열조’에서 ‘인조’로 바꾼다.

 홍문관 응교 심대부는 반정을 한 중종의 예를 따라서 ‘종’으로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망령된 의논을 내지 말라고 일축했다. 이에 대해서 홍문관 부수찬 유계와 사간원 사간 조빈도 역시 ‘조’를 반대하면서 왕의 강압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

 “신하의 상소가 쓸 만하지 못하면 그냥 나두면 될 일인데, 신하의 기를 꺾고 배척하는 것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전하의 마음이 공심입니까? 사심입니까?”

 “나를 병들었다고 하지 말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진술하라.”<효종즉위년 5월 23일>

 

효종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조와 종을 둘러싼 임금과 신하 간의 팽팽한 기 싸움이 느껴진다.

 효종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결국 ‘조’를 반대한 심대부와 유계를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낸다. 왕은 인사권과 형벌권을 무기로 사용했다. 

 후폭풍이 일어났다. 승정원에서도 유배를 반대했고, 사헌부와 홍문관에서도 반대 상소를 올렸다. 사헌부는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원 사직을 청했다. 사간원도 사직을 청했다. 

영의정과 우의정도 유배의 명을 거둘 것을 청하고 유계를 천거한 이조판서와 참판도 사직을 청했다. 

 

결국 효종은 한발 물러서서 유배를 취소시켰으나 몇 개월 후 다시 마음을 바꾸어서 유배를 보낸다. 

 심대부는 64세에 유배를 갔고 7년을 보내고 있었다. 전 예조판서 조경이 상소를 올렸다.

 “그동안 두 번의 대사면이 있었으나 심대부만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흔이 넘어서 조정에 다시 등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성덕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 스스로도 한스러울 만큼 옹졸하다.” <효종실록8년 7월 20일>



왕현철의 저서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 



 효종은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깎아내리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대부는 동료들로부터 충실하고 질박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인조에게 ‘조’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상소로 유배지에서 8년간을 보내고 생을 마감했다.  

 이후의 묘호에는 ‘조’가 없었다.


영조 때 중종을 다시 ‘중조’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으나 ‘종’을 ‘조’로 바꾸는 것은 너무나도 막중한 일이어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조선의 왕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의 원래 묘호는 영종, 정종, 순종으로 결정됐고 사용했다. 

여기에 ‘종’을 ‘조’로 바꾼 것은 후대의 왕, 철종과 고종이다.

 철종은 자신을 왕으로 올린 순원왕후 김씨(순조 비)가 승하하자 존호를 올리고 순종을 순조로 바꾼다. 영종과 정종은 고종이 영조와 정조로 바꾸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하고 조선의 왕은 사후에 모두 조와 종의 묘호를 얻었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태조, 세종, 영조, 정조 등......

 왕이 살아 계실 때는 상上, 전하殿下로, 외교문서에서 조선국왕으로 불리었다.

 왕의 실제 이름(예, 세종은 이도)은 피휘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조와 종을 붙이는 데는 왕과 신하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옛 문헌을 참고해서 ‘조’를 붙이지 말자는 상소로 왕을 직격했고, 자신의 직을 던지거나 목숨을 내놓은 신하도 있었다.

 조와 종, 한 글자의 차이에 조선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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