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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문(興仁門)이냐, 흥인지문(興仁之門)이냐 - 왕현철 전 KBS PD/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저자
  • 기사등록 2023-10-22 17:41:30
  • 기사수정 2023-10-24 1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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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의 현판은 '흥인지문'이다.   왕현철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 사직을 지은 다음, 도성을 쌓았다. 

백성 11만8천70명을 동원했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4개의 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남산)을 연결하는 약 18.6k㎡였다. 

한성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은 8개를 만들고 이름을 지었다. 

숙청문, 흥인문, 숭례문, 돈의문을 두고 이 4개 문 사이에 작은 문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을 두었다. 


이 중에서 5개는 속칭도 정했다. 정동의 흥인문은 동대문, 정남의 숭례문은 남대문, 동북의 홍화문은 동소문, 소북의 소덕문은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은 수구문이다. 


 이 문 중에서 숙청문은 숙정문으로 번갈아 사용했으나 그 이유는 기록이 없다. 홍화문은 혜화문으로 바꾸었다. 성종 때 창경궁을 짓고, 그 정문을 홍화문으로 해서 겹쳤기 때문이다. 


흥인문은 현재 현판이 흥인지문으로 돼 있다. 그러나 명확한 설명이 없다. 그 이유를 추적해 보자.

조선의 대표적 국가 기록물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인문’을 검색하면 201건의 기사가 나온다. 반면 ‘흥인지문’은 세조 때 딱 1건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개인 기록물도 거의 ‘흥인문’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기록물에 의하면 속칭 동대문은 ‘흥인문’이다.


<승정원일기>는 흥인문은 168건, 흥인지문은 121건의 기사가 나오는데, ‘흥인지문’은 영조 때 2건을 제외하고 모두 고종 이후의 기사다. 


이외 정조 때부터 기록한 <일성록>은 흥인문은 67건, 흥인지문은 69건의 기사가 나온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도 ‘흥인지문’이 나오는데 첩종할 때 군사를 종루와 흥인지문에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대내에서 큰 종을 치면(국가 비상 훈련을 하면), 오위는 광화문 앞길에 서서 종루와 흥인지문에 이르도록 한다. 疊擊大鍾, 五衛立於光化門前路, 乃至鍾樓·興仁之門。<경국대전/ 병전, 첩종 조>



동대문의 당당한 모습.  왕현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을 종합하면, 조선의 대부분은 ‘흥인문’이라고 했고, ‘흥인지문’은 고종 이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일성록>을 추가하면 ‘흥인문’과 ‘흥인지문’을 같이 사용했다.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서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에 ‘흥인지문’이 기록된 것은 특이하다.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편액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은 전혀 기록이 없고,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에서 그 단서를 추적할 만한 기사가 있다. 

영조는 ‘흥인문’을 왜 ‘흥인지문’으로 쓰느냐고 물었다. 


영조 : 돈의문과 승례문의 편액은 ‘돈의문’과 ‘숭례문’으로 썼는데, 흥인문은 ‘흥인지문’으로 썼다. 그 뜻이 무엇인가?


참찬관 서명형 : ‘지(之)’ 자를 우연히 더 쓴 것이겠습니까만 신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영조 : 한림은 아는가? 


한림 황경원 : 신도 자세히 모릅니다. 


영조 : 주서는 아는가? 


주서 이기언 : 신도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들은 바에 의하면, 나라의 수도, 한성 동쪽의 수구(水口)가 매우 허(虛)하기 때문에 별도로 곡성(曲城)을 쌓고, 현판에 ‘지’ 자를 썼다고 하였습니다. 한 글자(之)의 있고 없고가 수구의 허함과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조 : 주서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 이 설이 참으로 설득력이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17년 4월 11일>


 

영조의 질문에 세 명 모두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주서 이기언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영조에게 설명하고, 물의 입구의 허함은 글자 하나(之)와 관계없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도 덧붙였다. 영조는 이기언의 설명이 설득력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것이 두 개의 국가 기록물에서 흥인문에 ‘之’를 넣은 유일한 설명이다. 


흥인문 남쪽의 오간수교 아래에 오간수교 수로가 조성돼 있다.  왕현철 



조선시대, 흥인문 바로 남쪽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오간수문은 청계천의 흐르는 물을,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시내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흥인문 곁에는 도성의 물을 성곽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이 같이 두 개의 수문을 두었다. 

 

‘之’의 사전적 설명은 ‘가다, 도달하다. (영향을) 끼치다, 사용하다’의 뜻이다. ‘之’가 물에 가서 영향을 끼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물의 허함을 어떻게 보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풍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흥인문은 다른 문과 달리 유일하게 곡성(曲城)을 만들었다. 이를 옹성(甕城)이라고 한다. 

옹성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 밖에 원형이나 방형의 항아리 모양으로 쌓은 작은 성이다. 여기에 ‘철(鐵)’자를 붙여서 매우 단단하고 튼튼한 성은 철옹성이다. 


동대문플라자 바로 뒤에 이간수문이 복원돼 있다.  왕현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흥인문에 ‘之’를 넣어서 물의 허함을 보완하고, 옹성까지 쌓았으나 효과는 발휘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성으로 처음 들어온 것은 흥인문이었다. 왜군이 흥인문으로 들어온 기록을 보자.


 “왜군이 흥인문 밖에 이르러서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의심이 들어서 들어오지 못했다. 먼저 정탐 군사를 들여보내서 수십 번 탐지한 연후에 (조선의)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도성에 들어왔다.” <선조실록 25년 5월 3일>

 


왜군은 부산으로 쳐들어와서, 무인지경으로 북상하고 20일 만에 한성으로 들어왔다. 임금은 이미 도성을 몰래 빠져나갔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서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한성과 흥인문을 지켜야 할 군사는 아무도 없었다.


 ‘흥인지문’의 풍수의 기운과 옹성도 왜군을 막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흥인지문은 ‘풍수의 기운’과 ‘옹성’이 없는 숭례문보다 먼저 왜군을 허용하는 꼴이 됐다.


조선의 대부분은 속칭 동대문을 ‘흥인문’으로 사용했고, 정조 이후부터 ‘흥인문’과 ‘흥인지문’을 혼용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임금이나 신하 모두가 ‘흥인지문’을 왜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몰랐고, 일부의 신하가 풍수의 기운을 빌리기 위해서 ‘之’를 넣었다고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흥인문과 문밖의 옹성.  왕현철 


만일 주서 이기언의 설명대로 풍수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 ‘之’를 넣었다면 영 개운치 않다. 국가의 운명을 풍수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처럼 전란의 위기에서 앞장서는 지도자가 없고, 훈련된 군사가 없으면 ‘풍수’와 ‘옹성’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풍수’와 ‘옹성’보다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합된 힘이 국가를 지킬 것이다. 


속칭 동대문의 이름을 태조가 지었고, 조선시대 대부분이 사용한 ‘흥인문’으로 이름을 되돌려야 한다. 나라가 글자 하나(之), 풍수의 기운에 기대는 인상을 지워야 나라답다고 할 것이다. 





저자 왕현철은 KBS PD 출신이다. 퇴직한 후 <조선왕조실록> 완독에 도전해 2021년 <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1권에 이어 2022년 2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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