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신하들에게는 도읍지에 대한 의견을 문서로 올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사 무학대사도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무악으로 모시고 왔다. 조선의 설계자로 자부한 판삼사사 정도전이 먼저 의견을 내놨다.
정도전은 무악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서 뱃길이 통하는 것은 좋지만 골짜기를 낀 좁은 곳이어서 궁궐, 종묘, 사직, 시장을 세울 만한 자리가 없다고 반대를 했다. 그는 아울러 사람들이 음양 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워했다.
청와대. 태조는 이 곳을 조선의 도읍(궁궐터)으로 정한다.
그는 주나라가 800년이나 지속된 것도 지리의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한고조 유방은 항우가 버린 관중 땅에 도읍을 세워서 오히려 나라가 번창했다는 예를 들었다. 정도전은 국가를 잘 다스리는 것은 풍수지리의 성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달려 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도읍을 옮길 시기가 아니라는 ‘시기상조론’도 끄집어냈다.
현재는 고려의 무너진 기강을 세우고 백성들의 힘을 길러서 나라의 터전을 굳게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사(人事)를 다한 후에 불길함이 있다면 점을 치라고 결론을 맺었다.
정도전이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불길하면 점을 치라고 한 것은 이채롭다.
문하시랑찬성사 성석린과 정당문학 정총은 개성의 지덕을 강조했다.
“개성의 부소는 명당으로서 고려만을 위한 땅이 아니라 후대 왕의 도읍지로도 이치에 맞다”는 것이다.
첨서중추원사 하윤과 중추원학사 이직은 무악에 무게를 두었다. 특히 하윤과 이직은 우리나라 비결에서 예언한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한강에 임하라’ ‘무산(毋山)이라’는 곳이 무악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풍수지리보다 인재의 중요성과 시기상조론을 끄집어냈고, 신하들 일부는 여전히 개성에 미련을 갖고 있었으며, 태조가 도읍지 선정에 힘을 실어준 하윤이 주장한 무악은 많은 신하와 서운관이 반대를 했다.
새 도읍지를 둘러싼 주장은 각양각색이었다. 태조는 신 도읍지를 둘러싼 신하들의 분분한 의견에는 천도가 싫은 마음도 깔려 있다고 보았다.
태조는 “개성으로 돌아가 소격전(昭格殿)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 라고 결단을 내린다. 소격전은 해 달 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의 사당이다. 태조는 스스로 도읍지를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바로 남경(한양)으로 행차한다.
남경은 고려의 궁궐터가 있었고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태조의 남경 답사에는 서운관 책임자 윤신달과 무학대사가 동행했다. 태조는 남경 즉 고려의 옛 궁궐터를 둘러보고 산세도 관망했다. 태조는 먼저 윤신달에게 물었다.
태조 : “여기가 어떠냐?”
윤신달 : “우리나라에서는 개성이 으뜸이고 남경은 다음입니다. 이곳의 단점은 건방(乾方, 북서쪽) 이 낮아서 물이 마른 것입니다.”
윤신달은 서운관에서 보고한 개성을 여전히 앞세웠다.
이에 태조는 “개성에도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곳의 형세를 보니 도읍이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이 편리할 것이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사방의 이수가 고르다’는 것은 동서남북에서 사람이 오고가는 거리가 같다는 의미로 국토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조언도 구했다. 무학대사는 “(남경은)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라고 조언했다. 무학대사는 남경을 도읍지로 찬성하면서 대신들의 동의를 구하라는 단서를 단 것이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서 재상들에게 논의를 부쳤다. 대부분의 재상들은 “꼭 도읍을 옮기려면 남경이 좋습니다”라고 조건부 찬성을 했다.
그러나 하윤은 “남경의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이나 풍수지리는 좋지 못합니다” 라고 했고, 양원식은 “광실원 동쪽의 계족산이 비결의 주장과 비슷하다”라고 소수의견을 냈다.
태조는 그동안 도읍을 옮기기 위해서 서운관, 풍수지리학자, 무학대사, 여러 신하들로부터 문서로 보고를 받거나 얼굴을 맞댄 논의를 거쳤고 찬·반 의견도 낱낱이 들었다.
태조는 지리서도 공부했다. 계룡산, 무악, 남경을 현장 답사했다. 태조는 조선의 초기 지혜를 망라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태조의 결정만 남았다.

태조는 남경을 택했다. 남경은 한양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의 도읍으로 한양이 탄생한 것이다. 태조 3년 8월 13일이었다.
여기서 도읍을 정하는 좁은 의미는 궁궐터를 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궁궐터가 한양으로 정해진 것이다. 현재의 경복궁은 태조가 정한 남경(청와대 터)이 아니라 약간 남쪽으로 내려 와 있다. 그 이유가 있다.
태조는 한양을 그냥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사실상 결정했지만 소수의견을 낸 광실원 동쪽, 개성, 도라산 등도 살폈다. 무악도 다시 갔다. 현장을 확인하고 중론을 모았다. 이곳들은 반대의견이 많았다.
조선 초기의 최고정무기관 도평의사사는 “한양은 안팎 산수의 형세가 옛날부터 이름이 나 있었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와 뱃길이 좋아서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습니다”라고 문서를 올린다. 조선의 도읍 한양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태조가 천도를 결심한 이후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마무리였다.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한다. ‘ㅇㅇㅇ도감’은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설치하는 임시기구다. 예를 들어 왕의 무덤을 조성하는 것은 산릉도감이다. 조선은 도읍을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태조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신도궁궐조성도감 판사 심덕부, 김주, 이직, 그리고 좌복야 남은 등을 한양으로 다시 보낸다.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서다.
이들 준비단은 태조가 정한 남경의 궁궐터가 너무 좁다고 판단하고 그 남쪽의 평탄하고 넓은 곳을 궁궐터로 정한다. 이곳은 북쪽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은 것도 한 몫을 했다.
현재의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태조가 정한 최초의 자리보다 약간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다.
태조는 도읍을 정한 2개월 후 한양으로 서울을 옮긴다. 태조 3년 10월 25일이었다. 태조는 3일후 10월 28일 서울에 도착해서 한양부 객사를 이궁(離宮)으로 삼아서 거처한다. 서울 시민의 날(10월28일)은 이 날을 따왔다. 이궁은 임금이 한 때의 거둥에 필요한 곳이다. 아직 궁궐 건설은 착수하지 않았다.
태조는 도평의사사, 서운관과 함께 사전 준비단이 도면으로 그려서 올린 종묘와 사직의 터도 둘러본다.
도평의사사는 나라를 세워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세 가지를 문서로 올린다.
첫째, 종묘를 지어서 임금의 조상 조종(祖宗)을 봉안해서 효성과 공경을 높여야 하고 둘째, 궁궐을 건설해서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나라의 명령을 내려야 하며 셋째, 성곽을 세워서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도평의사사는 종묘, 궁궐, 성곽의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태조에게 건의했다.
태조 3년 12월 4일 오방의 지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종묘와 궁궐 공사를 동시에 시작한다. 궁궐의 터파기를 시작한 것은 스님들이었다. 관청에서 스님들을 모집해서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공사 초기에 백성들은 동원하지 않았다.
대사헌 박경의 상소에 따르면 “백성의 10분의 3이 스님이었고 세 등급이 있다. 불당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자는 상, 불경을 강론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자는 중, 종교의식이나 초상집에 찾아가서 의식을 구하는 자는 하”라고 분류했다. 박경은 이 중에서 하등의 스님을 공사에 동원하고 백성은 농사에 전념시키자고 했다.
궁궐 건설에 스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태조 4년 궁궐 건설을 위해서 농사철이 끝난 8월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한다. 경기도는 좌·우도로 나누어져 있었다. 경기좌도 4,500명, 경기우도 5,000명, 충청도 5,500명, 총 15,000명이 부역으로 동원된다. 약 50일 후 종묘와 경복궁이 완공된다. 태조 4년 9월 29일이었다. 궁궐 공사를 시작한 10개월 후다.
태조 즉위 4년에 경복궁이 탄생했다. 태조는 비로소 본격적인 거처를 마련했고 조선은 궁궐의 정문을 통해서 나라의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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