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3년여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조선의 도읍으로 남경(한양)을 선택했다. 태조의 도읍 결정 과정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참고: ‘왕현철의 조선이야기 – (3)한양과 경복궁의 탄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도읍에 대한 <야사>가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즉, 궁궐 (경복궁)을 정할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 차이가 있었고, 그 의견 차이로 인해서 200년 후 국가의 환란(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연 경복궁을 잘못 지어서 임진왜란을 초래한 것일까? 도읍(궁궐)을 둘러싼 <야사>를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서 정리한다.
조선의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개인 문집에서도 볼 수 있다.
정도전은 천도에 관해서 한 번의 상소를 올린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여기서 정도전은 풍수에 관해서 자신은 배운바가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음양 술수에 매여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음양 술수보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도전은 풍수지리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궁궐에 대한 의견 차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고 차천로가 지은 <오산설림>에 실려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도 나오는데 <오산설림>을 인용해서 소개하고 있다.
<오산설림>의 내용을 보자.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 경기, 황해, 평안도의 세 관찰사에게 무학대사를 수소문하게 한다.
세 관찰자는 합동으로 황해도 고달산의 초가집에서 홀로 거처하는 무학대사를 찾아서 태조에게 모셔온다.
태조는 도읍을 정할 땅을 묻는다. 무학대사는 한양을 가리키면서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 라고 조언을 한다. 진산은 도읍지에서 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키는 주산을 일컫는다.
인왕산과 광화문. 인왕산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
이에 대해서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으로 바라보고 다스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동쪽으로 바라보고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난색을 표한다.
무학대사는 “2백 년이 지나면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물러서지 않으면서 “도읍을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믿으면 (나라가)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으나 정씨(鄭氏)가 시비를 건다면 5대를 가지 못해서 왕권의 자리다툼이 생기고 2백 년이 못 가서 나라가 흔들리는 난이 일어날 것이니 조심하라”라고 <산수비기(山水祕記)>도 인용했다.
<산수비기>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것이라고 차천로는 밝혔다.
즉, 무학대사는 의상대사가 800년 전 산수비기를 통해서 도읍을 둘러싼 스님과 정씨의 시비를 이미 예언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궁궐 건설에 관해서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 후 국가의 환란을 초래 한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 차이의 핵심은 궁궐의 방향이다.
무학대사는 궁궐의 방향을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동쪽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도전은 남쪽을 바라보고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왕은 남쪽으로 바라보고 다스렸다”는 정도전의 언급은 논어에 나오는 내용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 4장
제1절 : “하는 일 없이 잘 다스린 분은 아마 순(舜) 임금일 것이다. 무엇을 하셨는가?”
제2절 :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하였을 뿐이다.”
즉 임금은 정치를 잘 한 순임금의 예에 따라서 남쪽을 바라보고 정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남면(南面)한다’는 사상이다.
정도전은 유학자답게 공자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에 비해서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방점을 두어서 궁궐을 에워싼 산과 방향을 중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복궁은 정도전의 주장대로 남쪽으로 지어졌다. 이것이 200년 후 나라의 환란(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오산설림>에서 무학대사는 나라의 일을 미리 예측했다는 신승(神僧)으로 높이 평가한 반면 정도전은 나라를 빼앗으려는 역심에서 무학대사와 다른 주장을 펼쳤다고 아주 깎아내리고 있다. <오산설림>은 임진왜란을 초래한 책임을 200년 전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경복궁)을 남쪽으로 지은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차천로는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서 실었을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오산설림>은 조선 초에서 선조 대까지의 여러 문인들의 일화, 사적, 시화 등을 비롯해서 중국 시문에 대한 평을 싣고 있는 차천로의 개인 문집이다. 특히 책은 성종 대의 일화를 많이 싣고 있는 데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이야기도 출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긍익은 <오산설림>을 야사류로 분류했다.
특히 <오산설림>에서 세 명의 관찰사가 황해도 고달산에 있는 무학대사를 찾아가서 모셔온 것은 의문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는 즉위 3개월 후 무학대사를 왕의 스승 왕사(王師)로 삼는다. 이후 태조는 무학대사의 법회에 참석하거나 궁궐로 초빙하는 등 여러 차례 만났다.
태조는 내시별감을 보내서 “이미 왕사가 되었으니 깊은 산림 속에 있어서는 안 되니 속히 서울로 돌아오시오”라고 자신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무학대사는 개성의 연복사, 양주의 회암사에서 주로 머물렀다.
태조가 계룡산 도읍지 후보를 보기 위해서 현장으로 떠날 때는 직접 회암사에 들려서 무학대사를 청해서 같이 갔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는 사람을 보내서 모셔왔다.
태조가 세 관찰사를 보내서 무학대사를 모셔왔다는 <오산설림>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오산설림>에 실려 있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이야기에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다.
백악산과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은 백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남쪽으로 바라본다.
차천로(1556~1615)는 선조와 광해군 대에 활동한 문인이다. 그는 부친, 형과 더불어 문장에 뛰어났다. 그는 일본과 청나라의 외교 문서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선조는 차천로의 뛰어난 문장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은 평탄하지 못했다.
선조 19년 차천로는 같은 고향 개성 출신 여계선의 시험을 대리로 쳐주어서 장원을 하게 한다. 이것이 발각되었다.
선조는 차천로의 대리 시험을 “유림들이 천만 년 동안 씻을 수 없는 수치” “여우나 쥐 같은 것을 용서하지 마라”라고 하면서 3년의 유배를 보낸다. 그는 사판(仕版)에서도 삭제되었다. 사판은 벼슬아치의 명부다. 영영 벼슬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나 그는 3년의 유배를 끝내고 다시 발탁된다. 선조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서도 그의 문장력을 높이 산 것이다.
선조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 배치한다. 이후에도 선조는 봉상판관, 교서관 교리로 임명하지만 차천로는 뇌물을 요구하거나 본처를 버리고 종실의 딸에게 다시 장가드는, 풍속 문란 행위를 한다.
차천로는 선비답지 못한 문인이었다. 선조는 유배를 보내거나 파직과 재임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차천로는 사판에서 조차 삭제된 자신을 거듭 발탁한 선조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지어서 같은 개성 출신의 한석봉에게 준다.
“한강 물은 띠가 되고 남산은 숫돌 되어도 / 漢水若帶南山礪
구중궁궐 은혜를 보답하기 어려우리 / 塵露難酬九重顧”
그의 또 다른 이력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문사에 뛰어난 인사를 대동하고 싶다고 선조에게 요청해서 일본으로 차천로를 데리고 간다.
차천로는 종사관으로 직급은 낮았지만 통신사 일행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귀국하는 통신사를 통해서 “자신은 국내를 통일했고 남은 소원은 명나라에 쳐들어가서 일본의 풍속과 제도를 억만년 시행하는 것임으로 조선이 앞장 서 달라”라고 조선국왕에게 답서를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략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임진왜란은 그 의도를 대비하지 못한 선조와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서 국가의 미래보다 자신들의 안위에 급급했던 권력자들의 책임이다.
차천로가 <오산설림>을 통해서 자신을 거듭 발탁한 선조와 권력자 대신 정도전에게 임진왜란의 화살을 돌렸다면 그것은 정말로 언어도단이다.
역사는 때로는 야사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더욱더 그렇다. 참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에 따라서 경복궁의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짓는다.
경복궁은 <시경(詩經)>에서 따왔다.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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