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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5) 한양도성을 쌓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3-14 19:38:05
  • 기사수정 2020-03-17 09: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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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km와 62,200척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양도성의 현대적 길이와 조선시대의 길이다. 

한양도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해서 둘러싼 네 개의 산 인왕산(서), 북악산(북), 낙산(동), 남산(남)으로 연결돼 있다. 

 조선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그 다음으로 도성을 쌓는다. 

 

한양 도성을 쌓는 일은 험난한 길이었다. 수십 만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태조가 시작해서 세종과 숙종의 개축이 있었다. 청나라와 외교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한양도성(사적 제 10호). 태조가 쌓기 시작해 세종, 숙종 대에 개축했다. 


 태조는 도성의 터를 먼저 둘러보고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해서 그 성터를 정하게 한다. 


태조 5년 농번기를 피한 1월에 백악산과 5방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도성 공사를 시작한다. 백성 118,070여 명이 동원되었다.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와 서북면(평안도), 동북면(함경도)의 백성이었다. 

 태조는 성 쌓는 역사를 직접 둘러봤다. 백성들은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처음 공사를 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태조는 야간 공사를 중지시켰고 아울러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도 역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흥인문(동대문)의 공사는 다른 곳보다 곱절이나 수고를 더 들여야 했다. 동대문은 지세가 낮아서 아래쪽에 돌을 포개어 올리고 난 연후에 성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을 담당했던 안동과 성산의 인부들은 마감일보다 10여 일을 더해야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은 기간을 연장해서 공사를 마치고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은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했다. 

 판한성부사 정희계의 생각은 달랐다. 태조는 도성 공사가 시작된  40여 일 후 ‘씨 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라고 전지를 내렸다. 


백성들은 임금의 명령에 모두 환호성을 올렸다. 정희계는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희계는 백성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지세가 낮아서 어쩔 수 없이 공사가 늦어졌기 때문에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태조는 정희계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안동과 성산의 백성들을 포함해서 마감일로 정한 날짜에 돌려보낸다. 처음으로 동원 된 백성 11만 8천여 명은 50여일 추위와 싸우면서 성을 쌓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태조 대는 돌로 된 석성과 흙으로 된 토성으로 쌓았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 평탄한 산에는 토성을 쌓았다. 석성은 19,200척이었고 토성은 43,000척이었다. 모두 62,200척(1척30.3cm)으로 현재의 18.6km와 거의 같다.  

 

두 번째 공사는 8월에 다시 시작했다.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에서 79,400 명이 동원되었다. 첫 공사에서 물이 솟아나거나 빗물로 무너진 곳을 다시 쌓았고 가능한 석성으로 바꾸었다. 

낮게 쌓은 석성은 더 높이 올렸다. 또한 도성으로 연결된 팔대문의 누합(樓閤)도 지었고 이름도 이 때 명명했다. 태조 5년 9월이다. 


서북은 창의문, 정북은 숙청문, 동북은 홍화문(동소문), 정동은 흥인문(동대문), 동남은 광희문(수구문), 정남은 숭례문(남대문), 소북은 소덕문(서소문), 정서는 돈의문이다. 


 태조 대의 도성 공사는 제도의 미비점도 있었다. 자은종 법천대사와 전 판사 윤안정은 판교원을 짓고 의원을 모시고 와서 성을 쌓다가 발생한 환자를 간호했다. 이들은 환자들의 병이 나으면 음식도 주어서 내 보냈다. 

 진원군(郡)의 외동 딸 도리장은 도성 공사에 동원된 아버지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났다. 그녀는 길거리에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녀는 마침내 판교원에 아버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고 부축해서 고향으로 모시고 올 수 있었다. 그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고향에서는 그녀를 효녀로 칭찬했고 국가는 면포를 내려주었다. 


나라의 일을 스님과 개인이 대신한 것이다. 다만 사망자는 나라에서 그 가족에게 쌀과 콩을 내려 주고 3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백성들의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백성들의 숙박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백성들이 한겨울의 추위를 어떻게 견뎠는지 안타깝지만 알 수가 없다. 

먹을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동원된 백성들은 각도의 관찰사를 통해서 미리 식량을 지급 받았다.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한양까지 올라오는데 10일 이상 걸렸다. 식량을 지고 오다가 중간에 도적 떼를 만나서 식량을 빼앗기면 보통 낭패가 아니다.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 나중에는 좁쌀과 묵은 콩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꾼다. 


 세 번째는 세종대다. 공조판서 최윤덕은 “성곽은 나라의 겉옷과 같아서 외환을 막고 내부를 호위함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을 편히 살도록 단단히 수리해야 한다”라고 건의한다.

 세종은 치밀했다. 세종은 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수리할 곳을 세밀하게 조사하게 한다. 도성수축도감은 현장조사를 거쳐서 약 40일 동안 43만 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동안 토성은 절반, 석성도 상당부분이 허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력 수급은 병조가 담당했다. 전국에서 322,400 명의 장정을 징발했고 석공 2,211명과 군사를 부릴 수 있는 수령 등 115명은 별도로 차출했다.

 

무엇보다 질병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도성수축도감은 성 쌓은 군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혜민국과 제생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각 고을의 의학생들도  약재를 가지고 올라오게 해서 서울의원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의원 60명과 간호 인력으로 스님 300명이 동원되어서 네 곳의 진료소를 운영했다. 


 음식은 40일 간의 식량을 싸 가지고 왔고 별도로 각 도의 수령관과 수령들이 술과 고기를 넉넉하게 공급했다. 그럼에도 38일 동안 성곽 수축에서 6백 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세종은 전부 석성으로 쌓았다. 성의 높이가 험지는 16척, 평지는 23척이었다. 5~7미터 정도다. 많은 돌이 필요하다. 돌은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세종 대까지는 성곽 주변에서 일부 돌을 캤다. 문종 대에 성을 보수하면서 돌을 캐는 규정을 보다 엄격하게 한다. 

성곽을 둘러싼 네 개의 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남산)과 성 밖의 보제원과 노원역, 벌아현, 청파역, 사현의 산등성이까지는 지맥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국가가 필요로 해도 돌을 캐지 못하게 했다. 


 숙종대의 기록을 보면 돌은 노원(蘆原)과 주암(舟巖)등지에서 가져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노원은 흥인문에서 4리 떨어진 곳이다. 현재의 노원구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주암은 한자로 봐서 배가 다니고 바위가 많은 곳으로 한강이 가까운 곳이 아닐까 추측한다. 모두 성곽 현장에서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성을 쌓는 데는 돌을 운반하는 역사에서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왔고 원망이 심했다. 


 네 번째는 숙종 대다. 숙종은 군사를 동원해서 돌을 캐고 성곽 보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암초에 부딪쳤다. 병자호란으로 ‘신구의 성을 쌓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한 청나라의 약속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외교문서를 보내서 청나라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와 ‘이미 시작한 공사를 그만둘 수 없다’라고 신하들 간의 논쟁이 팽팽했다. 그 의견 차이로 사직서를 내는 신하와 다독거려야 하는 숙종의 고뇌가 있었다. 


 숙종은 “오랫동안 강구하고 논의한 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밀어붙였다. 청나라에는 알리지 않았다. 숙종 31년(1705년)이었다. 태조가 첫 삽을 뜬 이래  312년 만에 한양도성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조선시대 공사실명제에 따라 한양도성에 새긴 직책과 이름.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공사 실명제를 도입했다. 도성을 축조하는 것은 나라의 만세의 계책임으로 증거를 남겨서 책임을 다하게 했다. 공사를 감독하는 장교와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겼고 또한 성이 무너지면 군법으로 처리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한양도성 18.6km, 한 번쯤 돌아볼만 하다. 백악구간은 1968년 1.21사태로 통제되었다가 노무현 정부 때 개방되어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을 했으나 이제는 이마저도 폐지되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모든 구간을 순성(巡城)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팔도 백성 50만 명 이상의 땀방울이 녹아 있다. 품삯은 없었다. 혹한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질병과 싸우면서 첨첨 쌓아 올린 돌로 된 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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