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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6) 왕조 교체, 왕씨를 제거하라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3-21 20:01:40
  • 기사수정 2020-03-26 06: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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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고려의 왕(王)씨에서 이(李)씨로 성(姓)이 바뀌는 왕조의 교체였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왕요)은 권좌를 내 놓고 지역(원주)으로 내려갔다.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씨에서 이씨로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고려를 추종하는 세력은 잠재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공신들은 고려 추종 세력을 언제나 되살아 날 수 있는 불씨로 여겼다. 불씨는 제거할 대상이었고 구실을 엿보고 있었다. 그 구실은 점(卜)에서 시작되었다.

 

태조 3년 동래 현령 김가행과 소금 무역을 담당하는 염장관 박중질은 장님 이흥무에게 점을 친다. 

참찬문하부사 박위가 두 사람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점을 쳐서 알고 싶은 핵심은 두 가지였다. 

 ‘공양왕과 현재의 임금(이성계) 중 누가 명운이 좋은가’ 

 ‘왕씨 가운데 명운이 귀한 사람은 누구인가’

 

태조는 사헌부와 형조, 순군만호부와 함께 이 일을 조사하게 했다. 

박위를 순군만호부의 감옥 순군옥에 가두고 경상도에 있는 김가행과 박중질을 체포해 오게 한다. 

이흥무는 점을 친 사실과 내용을 자백했다. 

이흥무의 점에서 명운이 귀하다고 나온 왕화와 왕거를 체포해서 감옥에 가둔다. 


 점(卜)은 태조의 명운과 왕씨들의 명운을 비교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사헌부와 형조에서 심문한 결과를 문서로 올렸다. “진술한 내용은 국가의 사직과 관계 된다”는 내용이었고, 이에 대해 “증거를 찾아서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숭의전(경기도 연천군 소재, 사적 제223호)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태조는 대범했다. 

태조는 “내가 박위에게 높은 작위를 주어서 후하게 대우를 하는 데 어찌 반란을 도모하겠는가. 박위와 같은 인재는 쉽사리 얻을 수 없다”라고 박위에게 술도 내리고 풀어주면서 복직을 시킨다. 


점을 친 세 사람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도 곤장을 치고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태조는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헌부와 형조는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와 형조는 그 불똥을 점을 치지도 않은 왕씨에게로 옮긴다. “왕씨를 제거하소서”라고 상소를 올린다. 

태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와 형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글을 올린다. “왕강은 지모가 남달리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는 용력이 대적할 사람이 없습니다. 개성에 있으면 반드시 반란을 선동할 것입니다. 제거해서 훗날의 근심을 방비하소서.” 

사헌부와 형조는 왕씨들이 반란을 모의한 내용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점(卜)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은 여러 명의 왕씨도 더해서 제거할 대상으로 올렸다. 


 태조는 여전히 대범한 자세를 유지했다. 태조는 왕강 등을 불러서 “사헌부와 형조에서 경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기를 청하고 있다. 경들은 모두 쓸 만한 인재로서 신임한다. 경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이전처럼 자유롭게 출입하라”라고 안심을 시킨다. 


 그러나 사헌부와 형조는 끈질겼다. 사헌부와 형조는 점을 친 사건이 발각된 이래 한 달 동안 왕씨를 제거하거나 섬으로 유배를 보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무려 10여 차례 올린다. 그럼에도 태조는 계속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헌부와 형조는 10번 째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김가행과 박중질이 점을 친 것은 공양왕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왕강과 왕격은 지모와 계략이 뛰어나고 왕승보와 왕승귀는 용맹이 남다릅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형제, 조카까지도 모두가 반란의 불씨가 될 수 있음으로 섬으로 내쳐서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소서.”

 

태조는 그래도 들어주지 않았다. 

사헌부와 형조는 상소에 더해서 업무를 보지 않은 것으로 왕을 압박했다. 

태조는 결국 태도를 바꾼다. 태조는 왕강 등을 불러서 “경들의 공로를 잊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공주, 영흥, 안변 등 여러 곳으로 나누어서 유배를 보낸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 없이 국초부터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 또 다른 왕씨들의 감시를 강화한다. 

 

태조의 빗장이 한 번 풀렸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사헌부와 형조는 점을 친 김가행, 박중질 등을 다시 국문을 해서 ‘왕씨 모반 사건’으로 몰아간다. 

 우선 점에서 거론된 공양왕은 두 아들과 함께 삼척으로 옮긴다.

 태조는 삼척에 교서를 보낸다. “동래 현령 김가행 등이 그대의 명운을 점쳤다. 사헌부와 형조에서 12번 왕씨들의 제거를 요구했고, 대소신하들도 같은 요구를 했다. 나는 마지못해서 그 청을 따르니 그대는 이 사실을 잘 아시오.” 


공양왕과 두 아들을 목 졸라 죽이는 교살형에 처한다. 

점에서 명운이 좋다고 거론된 왕화와 왕거를 참수한다. 왕화와 왕거는 아무런 행동도 한 바 없이 이유도 모르는 죽음을 당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죽음의 범위는 확대된다. 왕씨들을 강화나루와 거제 앞바다에 던지거나 빠트려 죽인다. 전국의 왕씨들의 씨를 말린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형조전서)윤방경 등이 왕씨를 강화 나루에 던졌다. -태조실록 3년 4월 15일

 (형조전서)손흥종 등이 왕씨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태조실록 3년 4월 20일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태조실록 3년 4월 20일”


 이와 더불어 고려에서 사성을 받은 왕씨는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어머니 성으로 바꾸게 한다. 조선 초기 왕씨는 한 줌의 땅도 설 곳이 없었다. 


 용케도 살아남은 왕씨는 있었다. 왕우(王瑀)다. 

왕우는 공양왕의 동생으로 태조 이성계와 사돈지간이었다. 왕우의 딸은 태조의 둘째부인 강씨의 아들 방번의 처 경녕 옹주였다. 

 태조는 왕우에게 경기도 마전군(현, 연천군)을 주고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 

그의 아들 왕조와 왕관은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해서 노조와 노관으로 바꾼다. 

왕씨의 일부가 성은 노(盧)씨로 바꾸었으나 핏줄은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의 왕들은 태조 대에 저질러진 왕씨 잔혹사에 대한 죗값을 갚으려고 노력했다.

정종은 마전현(연천군)에 사당을 세우고 고려 태조를 비롯해서 공덕이 높은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 등 8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 사당은 현재 연천군에 있는 숭의전의 모태가 된다.  


 태종 13년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20살이 되었음으로 호패의 성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공주 사람 이밀충은 “누이가 왕휴의 첩이었고 거을오미를 낳았으며, 태조 3년 전국에 왕씨를 죽일 때 누이와 거을오미는 내 집에서 숨어서 살았다”고 글을 써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왕휴와 관련된 친척 24 명을 포함해서 60여 명을 심문하고 거을오미를 감옥에 가두고 두 번이나 주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태종은 “비록 거을오미가 왕휴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죄를 주고 싶지 않다” “내가 마땅히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라고 끝까지 왕거을오미의 생명을 지켜준다.


 태종은 이전에 다른 사건으로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조정의 요구에 “왕씨 자손의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었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내가 그 때 침묵을 지킨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라고 때늦은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영의정부사 유정현은 태종의 이런  조치에 “왕씨의 후예를 남겨두어서 그 생을 누리게 하시니 지극한 인(仁)입니다”라고 태종의 존호에 한 줄을 보태었다. 

태종은 공양왕을 군(君)에서 다시 왕으로 회복시키고 제사도 지내게 한다. 

 





세종은 예조에 명해서 공양왕의 능을 관리할 법규를 자세히 만들어서 시행하게 하고, 숭의전의 은그릇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그릇으로 바꾸어 준다. 

또한 세자의 가례에도 왕 씨의 후손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조선은 비로소 왕씨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의 행사에도 참여시킨 것이다. 


 필자는 고려 왕건의 29대 손이다. 이 글을 쓰는데 망설였다. 글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조언을 했다. “역사를 기록하라.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더욱더 용기를 얻었다.


 한반도의 역사에 성(姓)과 핏줄로 왕이 되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왕조국가의 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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