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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 (7) 제2대 정종, 얼떨결에 왕이 되다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 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
  • 기사등록 2020-03-28 2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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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고려 수도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고 조선의 첫 세자로 방석을 정한다. 방석은 태조의 8명 아들 중에서 막내였다. 세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다음 왕이 된다. 

 그러나 태조의 왕위 계승자는 세자 방석이 아니라 둘째 아들 영안대군 방과가 된다. 


 태조는 왜 막내아들을 세자로 삼았을까? 왕위 계승자는 왜 영안대군이 되었을까?

 

후릉(제2대 정종의 묘. 북한 개성 소재). 사진=네이버이미지 


태조가 나라를 건국한 한 달 여 후 개국공신 배극렴, 조준, 정도전은 태조를 찾아가서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한다. 신하들이 제시한 세자의 조건은 나이와 공로였다. 나이는 당연히 태어난 첫째의 장남이 많고 공로는 다섯 째 정안대군 방원이 높았다. 

이 기준에 따르면 태조의 첫 부인에서 나온 대군들이 세자의 유력한 후보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는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 씨는 약 1년 전에 돌아갔다. 태조는 계비 강 씨의 뜻을 존중해서 강 씨의 첫 아들 무안대군 방번을 세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하들은 태조의 의중을 읽었다. 이들은 따로 모여서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고 볼품이 없고 다루기가 어렵다. 만약 강 씨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 한다면 막내 방석(10세)이 조금 낫겠다”라고 의견을 모았다. 

 태조가 신하들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막내아들 방석이 좋습니다.” 

 

정도전 등 조선의 개국 공신들은 미래의 권력 세자를 두고서 한 달 여 만에 조선을 건국한 결기와 자신들이 내세운 원칙을 내팽개쳤다. 태조도 마음에 둔 방번 대신에 신하들의 의견에 동조해서 조선의 첫 세자로 방석을 결정한다. 태조는 후일 이 결정을 매우 뉘우친다. 

 태조는 영안대군을 세자로 삼는 교지에서 “세자는 적자로서 장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만세의 도리이다. 내가 맏아들을 버리고 (계비의) 어린 자식을 세자로 삼은 것은 사랑에 빠져서 의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허물이다. 정도전 등도 세자를 적장자로 세워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간언(諫言)을 하지 않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태조는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베개머리 송사로 결정한 자신의 허물과 신하들의 탓으로 그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방석은 세자로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자 방석의 모습을 보자. 

 방석은 두 번 세자빈을 맞이한다. 첫 세자빈은 유씨(柳氏)다. 세자빈 유씨가 궁궐로 들어온 기록은 없다. 이와 반대로 유씨가 궁궐에서 쫓겨난 기록은 나온다. 태조 2년 내시 이만을 목 베고 세자빈 유씨도 궁궐에서 내쫓는다. 

 이틀 후 사헌부에서 “내시 이만을 참형하고 세자빈 유 씨를 궁궐에서 내쫒은 이유를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국문해서 진상을 밝히소서”라고 상소를 올린다. 


 태조는 사헌부의 상소에 노기를 띠고 그 관리들을 순군옥에 가둔다. 사헌부는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부서다. 사헌부는 자신의 업무를 아뢴 것이다. 담당 부서의 일상적인 업무로 감옥에 가두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태조는 둘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진상은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내시와 세자빈 유씨 관계는 묻혔다.  


 이로부터 1년 후 방석은 이조전서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는 기록이 나온다. 방석과 심씨 사이에는 아들도 생긴다. 방석이 살해를 당하는 제1차 왕자의 난 3개월 전이었다.    장인 심효생도 정도전의 편에 서서 방석과 같은 날 죽임을 당한다. 3개월 된 아기도 역적의 외손자이기 때문에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후 태종은 방석의 빈 심씨와 방석의 무덤을 관리하는 노비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면서 돌보지만 그 아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세자의 스승은 16명이었다. 정2품에서 정8품까지 좌·우로 나누어서 직명을 붙였다.

예를 들어 좌보덕·우보덕, 좌빈객·우빈객, 좌필선·우필선 등이다. 세자 한 명에 열여섯 명의 스승을 붙인 것은 조선에서 세자의 교육을 무엇보다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방석은 그런 기대에 부응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방석의 부정적 측면이 많다. 사헌부는 세자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소를 올렸고, 또한 사적으로 세자와 궁궐 밖으로 같이 나간 관리들을 탄핵했다. 대장군 남지와 장군 강유신은 세자를 궁궐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민간의 염소와 오리를 쏘아 죽이기도 했다. 태조도 말을 관리하는 책임자에게 세자가 궁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말을 내려주지 말고 감시하도록 했다. 

 

세자는 창기(娼妓)를 궁중에 데려오기도 했다. 세자의 스승 우보덕 함부림은 “창기를 궁중에 데려온다는데 참말입니까”라고 따져 묻자 방석은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소”라고 무안해 했다. 


세자로서 방석은 모범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석은 세자의 자리와 생명까지 내놓아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조의 다섯 째 정안대군 방원과 정도전의 세력이 맞붙은 제1차 왕자의 난이 터졌다. 난을 주도한 정안대군 세력의 승리였고 정도전은 살해를 당하고 그 세력도 무너졌다. 정도전 등이 세자로 옹립한 방석과 그 형 방번도 죽임을 당한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는 태조와 신하들이 세자 문제를 논의할 때 몰래 엿듣고 울면서까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선조 대의 문신 이정형이 지은<동각잡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결과가 두 핏줄의 생명을 앞당겼음을 짐작이나 했을까?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고 역사는 늘 일깨워주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욕심의 크기를 알지 못할 뿐이다.  


방석의 묘(경기도 광주시). 사진=네이버이미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이가 태조의 둘째아들 영안대군 방과다. 영안대군은 당일 어떤 역할을 했을까? 

 영안대군은 난이 일어났을 때 소격전에서 재계를 드리고 있었다. 부왕 태조의 건강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격전에서 변고를 듣고 종 한 명을 거느리고 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와서 김인귀의 집에 숨었다. 


김인귀의 집은 풍양현 검암에 있었다. 검암은 현재 태조의 능이 있는 구리시다. 경복궁에서 꽤 먼 거리다. 그는 말(馬)도 없이 걸어서 갔다. 그가 걸어서 김인귀의 집에 가서 몰래 숨었다는 것은 정안대군(방원)과 사전 교감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준다. 정안대군은 난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튿날 사람을 풀어서 영안대군을 찾아서 모셔온다.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태조는 정비 신의왕후 한 씨와 여섯 아들을 둔다. 태조의 첫 아들은 진안대군 방우다. 그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소주를 너무 좋아해서 날마다 마셨고 병으로 졸했다.

 그가 소주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제 2대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소주와 임금 자리를 맞바꾼 셈이다. 여섯 째 덕안대군 방연도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셋째 익안대군 넷째 회안대군 다섯째 정안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에 뜻을 같이해 현장에 있었고 공을 세웠다. 사실상 맏이 격인 둘째 영안대군은 현장을 피해서 숨었고 공도 없었다.


 모두들 태조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정안대군 방원을 세자로 삼고자 청했다. 그러나 정안대군은 사양을 했고 대신 형 영안대군을 세자로 천거했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정안대군은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임금에게 소를 올리도록 했다. “원컨대 적장자 영안대군을 세자로 삼으소서” 태조는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겠는가”라고 윤허를 내렸다. 영안대군은 세자가 되고 열흘 후 왕위까지 선위를 받는다. 

 

영안대군 방과는 동생 정안대군이 차려준 밥상에 맏이라는 숟가락을 얹어서 열흘 사이에 얼떨결에 세자가 되고 왕이 된 것이다. 제 2대 정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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