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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철의 조선이야기(8) 정종의 환도, 태종의 천도 -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왕현철 우리궁궐지킴이/전 KBS PD (wang…
  • 기사등록 2020-04-04 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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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2대 정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린다.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열흘 후다. 


즉위식은 세자 정종이 강사포와 원유관을 입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전국보(傳國寶)를 받고 백관의 하례를 받는 것이었다. 

정종은 다시 면복으로 갈아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부왕에게 상왕으로 존호를 올리고 절을 하는 것으로 즉위식은 마무리 됐다. 

정종은 부왕으로부터 선위(禪位)로 권좌를 물려받았으나 즉위식은 소박했다.  


 정종은 왕이 되자 부왕 태조와 나라의 정책을 크게 뒤집는 결정을 한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해서 3년여의 노력 끝에 도읍으로 옮긴 한양을 다시 버리는 것이다. 


 정종 1년 2월에 어머니의 능이 있는 개성으로 참배하려는 뜻을 신하들에게 밝히고 어가를 준비하게 한다. 문하부는 “임금이 조상을 받드는 것은 봄과 가을에 사당을 수리하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올리는 것뿐이니 행차를 중지하십시오”라고 만류의 상소를 올린다. 


조선 초기 문하부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서 모든 벼슬아치의 서무를 총괄했고 임금에게 직언을 올리는 간쟁 역할도 있었다. 문하부는 임금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자 뜰에 까지 나와서 두세 번 더 간청을 했다. 

그럼에도 정종은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떠났다. 왕은 따로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능 제릉을 참배한 후 개성 수창궁의 북쪽 언덕에 올라가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고려 태조의 지혜로움으로 여기에 도읍을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라고 고려 태조와 개성을 칭찬했다. 정종의 칭찬은 개성으로 환도하고자 하는 자신의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정종은 한양으로 돌아와서 종친, 외척과 공신을 모아서 도읍을 옮기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천문·역일을 담당하는 서운관은 “까마귀가 떼 지어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이며, 또한 여러 번 재이가 있었기 때문에 공구수성하고 피방해서 변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공구수성은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것이고 피방은 재난의 방위를 피하기 위하여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도읍을 옮기는 구실로 재이를 피하고자한 것이지만 까마귀와 까치도 한 몫을 거들었다. 

 

정종은 서운관의 보고서를 재상들에게 보여주었다. 종친과 여러 재상들은 서운관의 보고서에 맞장구를 치면서 “개성은 신하들과 군사들이 의탁할 궁궐과 집들이 있습니다”라고 의논의 일치를 보았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는 신하들과 숱한 논의와 현장 답사를 거쳐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결정이었으나 정종의 개성 환도는 순풍의 돛단배 같았다. 

임금과 신하들의 속마음이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신하들에게 개성은 정든 집뿐만 아니라 조상의 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개성으로 환도를 결정했다. 


 개성으로 환도 소식이 퍼지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이삿짐을 이고 지고 성문으로 몰려들었다. 오히려 문을 닫아서 제지해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결정에 홀로 눈물을 짓는 이가 있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였다.


 태조는 개성으로 출발하면서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능 정릉(貞陵)을 두루 살펴보고 떠나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조는 “내가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나만의 뜻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과 의논을 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양을 떠났다. 


태조는 개성에 도착해서도 “내가 한양으로 천도해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다시 개성으로 환도했으니 실로 부끄럽도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나를)보지 못하게 어둠이 내리면 출입을 해야겠다”라고 털어놨다. 


 태조는 조선을 세웠고, 상왕이었지만 아들인 임금의 결정에 따랐다. 이후에 태조는 주로 불교에 의지해서 울분을 삼키며 타들어가는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면 경복궁이 눈 아래 있고 오른쪽으로 남산이 보인다. 


정종은 왕으로서 2년 2개월 상왕으로서 19년 동안 6명의 빈(嬪)과 4명의 후궁에서 2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정종은 정작 정안왕후 김씨와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일어난 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임금의 적자가 없음으로 동복의 아우가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터이다. 후사는 대를 이어갈 세자를 의미한다. 셋째 방의, 넷째 방간, 다섯째 방원이 세자의 후보다. 

 셋째는 성품이 순후하고 시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지병도 있었다. 넷째 방간은 당연히 순서대로 자신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자신과 소수의 생각이었다. 


대부분은 세자의 자질로서 다섯째 방원을 꼽았다. 방원은 과거에 합격한 인재로서 영민하고 지혜로웠으며 나라의 개국과 안정에도 공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방간은 배움도 모자랐고 성품도 불뚝하고 광망하다는 평이었다.

 방간은 동생 방원을 치기위해서 먼저 칼을 뽑았으나 중과부적이었고 전략도 미흡했다. 임금도 방간에게 좌승지를 보내서 항복을 권했다. 제2차 왕자의 난도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난으로 방원은 세자가 되고 내외의 군사도 거느린다. 권력은 급속히 세자 방원에게 쏠렸고 왕위도 물려받는다. 제 3대 태종이 된다. 


 태종 1년 남양군 홍길민이 상소를 했다. 

“도읍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입니다. 종묘에 제향을 하려면 두 도읍(개성과 한양)을 왕래하는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이것은 효도의 도리가 아닙니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 뜻을 잘 이어받으십시오.”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권한 것이다.

 

그러나 신하와 백성들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일궈온 개성을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효를 생각하면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고 민심을 중히 여기면 개성에 있어야 했다. 태종은 선택을 해야 했다. 

 태종은 주요 정승과 문무 각사들에게 논의를 부쳤으나 의견은 왈가왈부했다.

 “신도(한양)는 태조가 창건한 땅으로 종묘와 사직이 있다.”

 “구도(개성)는 민심이 평안하게 여긴다.” 

 해가 반나절이 지나도 의견은 팽팽했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태종은 계속 의정부·종친·국가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할 것인가?” 

 “종묘와 사직을 개성으로 이안(移安)할 것인가?” 

 이안은 신주나 영정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견은 종묘를 개성으로 이안하는 것에 찬성했다. 개성에 그대로 안주하고 싶은 것이다. 


 좌정승 조준은 주나라의 양경제도를 참고해서 보고했다. 

“한양은 태조의 창건 도읍이고 개성은 백성의 삶의 터전임으로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개성에도 따로 종묘를 세워서 두 곳에서 일 년에 네 번 제사를 모시자.” 

태종은 조준의 의견을 따라서 “두 도읍을 폐지하지 말라”고 의정부에 하교를 내리고 앞으로는 다시 의논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개성은 고려에 이어서 조선의 도읍으로 계속 이어지는 듯 했다. 


 이 결정을 다시 바꾸는 것은 태조였다. 태조는 지신사 박석명을 불러서 “개성은 왕씨의 옛 도읍으로서 그대로 거주할 수는 없다. 개성으로 환도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라고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하게 했다. 

 태종은 부왕의 뜻을 존중했다. 효를 중히 여긴 것이다. 태종은 바로 성산군 이직, 취산군 신극례를 한양이궁조성도감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궁(離宮)은 한양에 별도의 궁궐을 짓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피를 흘린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태종은 서운관·풍수학자 등을 한양으로 보내서 길지를 찾게 했다. 그러나 진산 부원군 하윤은 지리와 도참서를 근거로 해서 한양의 무악을 주장했다. 하윤은 계룡산 도읍지 취소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풍수학에 권위를 갖고 있었다. 또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단안을 내린다. 개성, 한양, 무악 중에서 점(卜)을 쳐서 길흉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도읍이 결정되면 두 번 다시 재이가 있더라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했다. 점은 동전을 세 번 던져서 하나의 괘(掛)를 만들어 길흉을 판단하는 척전(擲錢)으로 결정했다. 

 

태종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종묘에 들어가서 예를 올렸다. 점을 친 결과 한양은 2길 1흉, 개성과 무악은 각각 1길 2흉이었다. 한양은 또 다시 태종의 결정으로 조선의 도읍이 되었다. 태종은 향교동 동쪽에 이궁을 짓도록 명령을 내린다. 현재의 창덕궁이다.

 

태종은 태조를 찾아가서 한양으로 돌아간다고 보고했다. 태조는 기쁨을 감추고 못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현재의 서울, 한양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조선 태조의 집념과 두 번의 천도로 조선의 도읍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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