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창업군주로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부인 신의왕후로 추존된 절비(節妃) 한 씨와 6남 2녀, 두 번째 부인 현비(顯妃) 신덕왕후 강 씨와 2남 1녀, 두 명의 후궁에게 각각 한 명의 딸이 있었다. 아들은 8명, 딸은 5명이었다.
태조는 57세에 왕위에 올라서 7년간 권좌에 있었다. 이후 상왕과 태상왕으로서 10년간을 지내다가 74세에 생을 마감했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여덟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첫째는 진안대군 방우다. 조선 제 22대 왕 정조 13년 선왕 영조의 능을 참배하고 서울 근교에 머물러 있었는데 방우의 15대 후손 이국주가 글을 올린다. 그는 “진안대군을 풍덕(豐德)에 장사지냈는데 이후 자손 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서 묘를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풍덕에 물이 넘쳐서 작은 비석이 드러났고 그 비석에는 ‘진안대군 처 지 씨의 묘’ 와 더불어 그 옆에 ‘대군묘재좌(大君墓在左)’의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 것이다.
정조는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은 바로 우리 집안의 오태백이다”고 하면서 무덤을 다시 봉축하고 큰 비석을 세운다. 정조는 비석에 “대군의 이름은 이방우로서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으며 부귀영화에 전혀 뜻이 없었다”는 글도 내렸다.
정조가 진안대군을 비유한 오태백은 주 태왕(周 太王)의 맏아들로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후계의 뜻이 없음을 알고 세자 자리를 버리고 지역으로 내려간다. 진안대군도 오태백처럼 세자 자리를 버리고 지역으로 내려갔다는 의미이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한 데는 위화도 회군이 큰 계기가 된다. 태조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서 지도자로 부상했고 주변에 사람도 모였다.
반면 이 때 태조 곁을 조용히 떠나는 이가 있었다. 장남 진안대군 방우였다.
진안대군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으로 명나라를 받들자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은거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의 예의판서까지 올랐으나 아버지와 맞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예 어리석은 사람으로 행동하면서 국가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와 물리적 거리를 더 두었던 것이다. 태조도 그의 뜻을 존중했고 그 대신 먹고 살 충분한 전지와 집을 내려준다.
그의 은거 생활은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방우는 태조의 맏아들로서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였다”고 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방우는 장남으로서 부왕의 뜻에 맞서지 않고 형제애를 지키려고 스스로 권력과 멀어져서 술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39세로 아버지보다 15년 앞서 갔다.
둘째는 영안대군 방과로 제2대 정종이다. 그는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얼떨결에 세자가 되고 왕이 된다.(참고 : 왕현철의 조선이야기 (7) 제2대 정종, 얼떨결에 왕이 되다)
정종실록 총서에 따르면 영안대군은 고려의 장군으로서 아버지를 따라서 출정하여 공도 세웠다. 그는 부모에게 공손하고 공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올라서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나오게 한다.
그는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3년여의 노력 끝에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것을 다시 개성으로 환도한다. 정종의 개성 환도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와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정종은 아버지의 뜻을 뒤집은 것이다.
태조는 개성으로 환도를 위해서 한양을 떠날 때 “(지난번 한양으로 ) 천도를 할 때는 내 뜻만이 아니라 신하들과 결정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영안대군은 왕이 되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63세로서 아버지 보다 앞서 가지는 않았다.
셋째는 익안대군 방의다. 익안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에 참가해서 정사일등공신에 오른다.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군사를 맡기도 했으나 성품이 온화했고 첫째처럼 세자 자리에 뜻이 없었다.
그는 손님에게 술자리를 베풀어서 취하여도 일체 시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병약했고 1년 이상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다섯째 방원은 왕위에 올라서 문병했을 때 초췌한 형의 모습을 보고 울기도 했다. 그는 44세로 아버지 보다 4년 앞서 갔다.
태조어진(전주 경기전 소장, 국보 제317호).
태조의 첫째와 셋째는 권력욕을 탐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과 형제애를 소중히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앞서 간 불효자가 되었다.
넷째는 회안대군 방간이다. 방간도 제1차 왕자의 난에 참가해서 정사일등공신에 오른다. 그는 첫째, 셋째와는 달랐다. 그는 둘째 정종의 후사가 없자 차례대로 자신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를 부채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포였다. 박포는 원래 방원의 조전절제사였으나 제 1차 왕자의 난 공적에 불만을 품고 형제간의 틈새를 이간질했다. 방간은 동생 방원을 치기위해서 먼저 칼을 뽑았다.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는 소식을 듣고 “너(방간)가 방원과 아버지가 다르냐? 어머니가 다르냐? 어찌 소 같은 인간이 되었나”라고 한탄했다.
그는 패배해서 유배를 간다. 그는 동생을 죽이고자 난을 일으켰으나 아버지에게는 자식이었다. 태조는 유배를 간 그를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러나 태조는 한 때 자신의 신하였던 조정대신들의 극력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조는 방간의 유배 중에 눈을 감아야 했다. 방간은 아버지에게 응어리를 남긴 것이다. 방간은 여러 곳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57세에 병으로 생을 마쳤다.
다섯째는 정안대군 방원으로 제 3대 태종이다. 태종실록 총서를 보면 방원은 아버지를 닮아서 “용의 얼굴에 우뚝한 코를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태종은 우선 외모부터 아버지를 빼닮은 것이다.
정안대군은 고려의 과거에 합격한 인재였지만 무인으로서도 아버지의 개국을 도왔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개인적 소신도 굽힐 줄 알았다. 대표적 사례가 불교에 대한 그의 이중적 태도다.
태조는 퇴위 후에도 불교에 의지하는 생활을 했다. 반면 정안대군은 왕이 되어서 신하들과 같이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불교를 배척했다. 불교에 대한 서로의 다른 생각은 충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자간의 충돌은 없었다. 태종이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국가 정책으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부왕이 요구한 불교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 신하들은 불교에 대한 왕의 이중 잣대를 지적했지만 태종은 효로서 신하들을 설득했다.
태종은 부왕의 거동에도 매우 신경을 썼고 자주 문안인사를 해서 술자리도 마련하고 때로는 함께 춤을 추기도 했고 모시고 자기도 했다.
태조도 태종의 효도에 맞장구를 쳤다. 태조는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위화도 회군, 조선의 개국과정을 태종에게 자세히 설명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의 여덟 아들 중에서 방원은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태조와 태종은 ‘함흥차사’라는 야사의 기록에 의해서 권력을 나눌 수 없는 비정한 관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태종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하면 ‘함흥차사’는 없었다. (참고 : 왕현철의 궁궐이야기 (22) 함흥차사,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여섯째는 덕안대군 방연이다. 그는 태조실록 2년에 “일찍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방연은 고려의 과거에도 합격했고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보다 앞서 간 것은 분명하다. 그도 첫째와 셋째처럼 불효자가 된 것이다.
일곱째와 여덟째는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폐세자)이다. 태조에게 두 아들은 참으로 많은 회한을 남겼다.
태조는 정종을 세자로 책명하는 교지에서 “내가 (신덕왕후 강 씨와)사랑에 빠져서 방석을 세자로 택한 허물이 있다”고 후회를 한다. 또한 그 결정은 자식들 간의 골육상쟁을 벌였고 두 어린 생명을 더 단축시켰다. 태조가 불교에 더욱더 의지한 것도 두 아들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태조는 결과적으로 2명의 자식이 왕이 되었지만 다섯 명의 자식을 앞세워야 했다. 한 명은 유배를 갔어도 구제할 수 없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이 있다. 태조는 조선의 창업군주였지만 여덟 명의 자식은 각자의 가지였던 것이다. 그것도 태조의 손이 닿지 않은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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